'책임감'. 어쩌면, 초등학생들의 가정 통신문에 가장 빈번히 등장하는 단어일지 모른다. 나 역시,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고, 내뱉던 말이다. 여러분의 가슴을 짓누르는 '책임감'은 어느 정도의 크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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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의 아내, 한 아이의 어버지, 한 가정의 가장인 '마이키'는 뉴욕의 부모님댁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런데, 이 남자, 공항으로 향하는 전철 안에서 갑자기 마음을 바꿔 먹는다. 홀연히 부모님댁으로 돌아오더니, 비행 스케줄이 꼬였다며 하룻밤을 더 보낸다.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항공사 핑계로 며칠 머물더니, 나중에는 온갖 거짓말로 부모와 아내, 직장동료를 속이며 도통 뉴욕을 떠날 낌새가 없다.

아내에게는 연락 두절 신공을 펼치고, 부모에게는 정숙한 아내를 불륜녀로, 직장동료에게는 멀쩡한 어머니를 위독한 환자로 만들어 버린 뒤, 따사로운 캘리포니아의 햇살 대신, 뉴욕의 매서운 칼바람을 기꺼이 받아 들인다. 손때 묻은 어질 적 장남감을 만지작 거리고, 첫사랑에게 보내려다만 편지를 읽거나, 떠나간 그녀에게 저주를 퍼붓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하루 하루를 그냥 흘려 보낸다. 그러는 사이, 그의 아내와 부모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도대체 왜 '마이키'는 떠나지 않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마이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은 별 특별한게 아니다. 자신의 체취가 가득한 다락방 침대와 그 침대에서 내다보이는 익숙한 풍경, 입맛에 쩍쩍 달라붙는 어머니의 음식, 손때 묻은 장난감과 청춘의 열병으로 가득한 노트 몇 권이 전부다. 그렇다. '마이키'에게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내동댕이치게 만든 범인은 바로 '추억'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의 부모님댁은 그에게 자유의 공간이다. 기안서를 재촉하는 직장상사도, 시도때도없이 빽빽 울어대는 딸내미도, 자신에게 온전히 의지하는 아내도 없다.  부모님은 '마이키'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잘 먹고, 잘 자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다. 그의 부모는 홀로 가정을 지키는 며느리보다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마이키'의 심리 상태가 더 걱정스럽다.
 
사실 따지고 보면, '마이키'는 우리 사회가 가장 싫어하는 종족이라고 할 수 있는 '책임감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인물'이다. 비록, 양심의 가책 때문에 괴로워하는 '인간적인' 면모를 보일 지라도, 하루라도 더 버티기 위해 휴대폰을 꺼버리고, 전화 메세지를 삭제할 뿐만 아니라 자칫 목숨을 건 도박이 될 수도 있는 '계단 구르기'까지 감행하는 그를 보노라면, 한심하다 못해 답답해 진다. 여기에 뉴욕 독립영화 특유의 느릿한 워킹과 뼈만 앙상한 연출이 더해져, 관객의 인내를 시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덕분에, 영화가 중반에 이를 즈음,  고개를 돌려 객석을 바라보면, 관객의 절반은 가수면 상태에 빠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머지 절반은 '마이키'의 발목을 붙잡은 이유가 밝혀지는 극적인 사건을 고대하며, 감기는 눈꺼플을 간신히 까뒤집는 듯 했다. 하지만, 그런 사건은 결코 벌어지지 않는다.

'마이키'의 발목을 붙잡은 것이 '추억'이라고? 그래, 그럴수도 있다. 어쩌면, 그토록 저주했던 첫사랑의 그녀를 만나기 위한 것은 아닐까 살짝 의심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마이키'의 비정상적인 행동을, 온전히 '추억' 때문에 비롯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도피'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임감으로부터의 도피. 한 가족의 가장이 되는 순간부터 도망치고 싶어도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책임감'에 짓눌린 현실을 잠시나마 벗어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나 역시 '마이키'처럼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부모님댁에서 뭉기적 거린 적이 있다. 어서 집으로 가자는 아내와 아이들의 성화를 못마땅해 하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어거지로 옮겨본 적이 있다. 아마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이라면, 누구나 나와 비슷한 경험이 있을 터. '마이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 '뭉기적'이 조금 오래 지속됐을 뿐.

* 사족 - 영화가 끝나고, 가수면 상태로 빠져든 관객을 깨운 건 영화제 자원봉사자들이 아니라, '마이키'가 부른 '저주의 세레나데'였다. 'FUCK'이란 단어가 그토록 귀엽게 들리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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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01 18:58 2009/05/01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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