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뉴스의 상당 부분은 공공기관으로부터 나온다. 이때, TV 뉴스는 해당 기사와 관련이 있는 화면을 사용하게 되는데, 공공기관 뉴스의 경우, 딱 떨어지는 화면을 촬영하기가 어렵다. 예를들어, 요즘 한창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국세청 내부의 '기류'와 관련된 뉴스라고 치자. 도대체, 무슨 화면을 써야 할까? 대다수 방송사는 이런 경우, 국세청 건물과 현판을 촬영한 화면을 사용한다. 직원들이 국세청을 드나드는 모습과 사무실에서 일하는 모습을 쓰기도 한다. 은행과 관련된 기사라면, 해당 은행원들이 업무을 보는 모습을 내보내는 방식이다.
이런 화면을 '자료화면'이라고 부르며, 그때 그때 촬영하는 게 원칙이나, 대체로 과거에 촬영해 논 장면을 보관했다가 계속 반복해서 사용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게다가, 공공기관의 뉴스는 몰려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어느 공공기관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면, 적게는 수일, 많게는 수주일 동안 뉴스량이 급증한다. 따라서, 위 사례처럼 공공기관에 근무했던 '죽은 사람'이 줄기차게 TV 뉴스에 등장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3개월 전에 퇴직한 박국장이 열심히 근무중이거나, 작년에 암으로 사망한 김과장이 멀쩡히 살아서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
그래서, 방송사들은 불특정 인물이 등장하는 화면은 되도록이면 뒷모습을 촬영하거나, 포커스 아웃, 모자이크 처리를 통해 식별이 불가능하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소송의 우려가 있는 부정적인 내용의 기사가 아닌 경우, 이 부분이 소홀해진다. 어쩌면, 굳이 그럴 필요을 느끼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지도 모른다. 가끔, 이같은 사례 때문에 항의나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실제로, 지난 9일, 어느 부모가 장애가 있는 자녀의 모습을 허락없이 뉴스에 방영한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제기, 배상금을 지급받게 된 판결이 있기도 했다. 해당 부모는 지난 2006년 MBC의 모 시사 프로그램에서 자신들의 아이를 촬영하는 건 허락했으나, 이후 3차례 방영된 뉴스는 초상권 사용을 허락 한 적이 없었다는 게 소송의 요지였고, 법원은 당사자의 동의없이 과거의 자료화면을 뉴스에 사용한 MBC에 책임이 있다며, 500만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린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에 언급한 사례처럼, 사망한 가족의 초상권은 인정 받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死者의 초상권'은 인정 받지 못한다. 지난 2006년 대법원은 고인의 명예를 심각히 훼손하지 않았다면, '死者의 초상권'은 인정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만약, '死者의 초상권'을 인정하게 되면, 수많은 역사적 인물들의 후손들이 '초상권 소송'에 나설 것이고, 그리되면, 공공의 이익에 심각한 손해가 발생한다는 점을 고려한 판결이다. 유명인의 '초상권'을 경제적 이득의 목적으로 사용해도, '저작권'처럼, 사후 50년이 경과한 이후에는 '초상권'이 소멸된다고 규정해, 상속권자의 '초상권 상속' 역시 제한했다.
결국, 죽은 아들의 모습을 자료화면에서 삭제해 달라고 요청한 70대 노인에게는 유명인이 아닌 사망한 아들의 '초상권'을 주장할 권리가 없는 셈이다. 만약, 그 화면으로 인해, 심각한 정신적 장애을 입었다는 합리적, 과학적 근거가 있다면, 극히 제한적인 범위 내에서의 손해 배상은 가능할 수도 있지만...
따라서, 70대 노인의 울음 섞인 전화를 받은 나는 난감한 상황에 봉착했다. 내게는 자료화면을 삭제할 권리가 없었을 뿐더러, 방송사의 재산인 자료화면을 합리적 근거없이, 정서적 이유만으로 삭제하자고 건의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뉴스 편집 담당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되도록 그 화면을 사용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하는 것 뿐이었다. 다행히, 상황을 이해한 담당자의 배려로, 그 화면은 더이상 뉴스에 등장하지 않았고, 70대 노인 역시 다시는 항의 전화를 하지 않았다. 현행법상, '인간적인 배려' 이상의 그 무엇은 기대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posted by PD the ripper
"방송"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버라이어티쇼와 영화배우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09/11/23
- 뜬금없는 전개도 매력적인 시크릿가든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0/11/28
- 안마시술소 잠입 취재중 보일러실에 갇힌 사연 (댓글 12개 / 트랙백 0개) 2009/07/20
- 오페라스타=나는 가수다+위대한 탄생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1/03/25
- '우결', 그들은 왜 노래를 할까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0/12/12
- '몽땅 내 사랑', 왜 존재감이 없을까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0/12/17
- '아테나', 초반에 정우성은 왜 주춤했을까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0/12/15
- '드림하이', 배용준은 왜 박진영을 만났을까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1/01/04
- 무한도전, 타인의 삶으로 소통하다.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1/01/24
- 토니안, 예능의 샛별로 떠오르다. (댓글 0개 / 트랙백 0개) 2010/11/19
2009/06/18 12:12
2009/06/18 12:12





